전주대표적인 축제 전주단오
전주 단오는 고려말과 개국초부터 전주에서 행해진 역사를 가진 축제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건국 직후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종묘와 사직 그리고 산천과 성황(城隍), 석전(釋典)의 제사를 거론하고 있으며, 여러 주군(州郡)의 성황(城隍)은 나라의 제소(祭所)이니, 다만 모주(某州) 모군(謀郡) 성황(城隍)의 신이라 일컫고, 위판을 설치하여 각기 그 고을 수령에게 매양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에 전국의 성황신에게 작위를 내리는데, 태종실록을 보면 중관 김수징을 보내어 완산의 성황신에게 제사지냈다(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0월 2일)는 기록이 있으며, 특히 전주 성황은 개성의 송악 성황과 함께 옛날 그대로 소재관에게 스스로 행하게 하였다.
이어서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을 보면 “단오·추석·동지·납일의 제사는 한결같이 전례에 의하여, 봄, 가을 중월에 예관을 보내어 여러 능을 순시하고, … 또 전주, 평양의 태조 진전의 별제(別祭)는 전례의 의하여 본도의 사신과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행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태종 때 오월 단오날에는 석척군(石擲軍)을 두 패로 나누어 서로 돌을 던져서 무예를 겨루었던 것이다.
단오는 충숙왕과 공민왕의 자료가 나온다. 태조 이성계는 22세가 되던 공민왕 5년(1356년)에 비로소 벼슬하였다. 고려의 풍속는 매양 단오절에 무관의 나이 젊은 사람과 의관의 자제들을 뽑아서 격구의 기예를 익혔는데, 그 날이 이르면 구규(九逵:도시의 큰 길)에 용봉(龍鳳) 장전(帳殿:휘장을 설치한 집무실)을 설치하고 길 복판에 구문(毬門)을 세우고, 왕이 장전(帳殿)에 나아가서 이를 구경하였다.(태조 실록 1권)
이에 전주 단오의 의미와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단오의 의미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수릿날[戌衣日 ⦁水瀨日] ⦁중오절(重五節) ⦁천중절(天中節) ⦁단양(端陽) 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처음, 곧 첫 번째를 뜻하고, ‘오(午)’자는 오(五), 곧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初五日)’라는 뜻이 된다. 일 년 중에서 가장 양기(陽氣)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여겨왔고 예전부터 여러 가지 행사가 전국적으로 행해져 왔다. 단오는 더운 여름을 맞기 전의 초여름의 계절이며,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祈豊祭)를 올리는 때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큼 단오는 예부터 큰 명절로 여겨져 왔는데 조선 중종 때 기록에는 왕 13년(1518)에는 설날 ⦁ 추석과 함께 ‘삼대명절’로 정해진 적도 있었다.
2. 단오의 풍습
(1)수리취 떡
이날 에는 산에서 자라는 수리취[狗舌草]라는 나물을 뜯어 떡을 한다. 또 쑥으로도 떡을 해서 먹는데 떡의 모양을 수레바퀴[車輪]처럼 둥글게 만든 데서 [수릿날]이란 말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수리란 우리말의 수레[車] 인데 높다[高], 위[上], 또는 신(神)이라는 뜻이 있어서 ‘높은 날’, ‘신을 모시는 날’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2) 익모초와 쑥 뜯기
또한 단오 날에는 익모초와 쑥을 뜯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은 약용으로 쓰기 위해서이다. 단오 날 오시(午時)에 익모초와 쑥을 뜯어서 말리고 이것을 약용으로 쓰면 다른 때에 뜯은 것 보다 약효가 더 하다는 것이다. 익모초(益母草)라는 이름 자체도 모체에 이롭다는 의미가 있듯이 여름철에 익모초를 즙으로 해서 마시면 식욕이 왕성해 진다고 한다.
그리고 단오 날 이른 아침에 쑥을 뜯어다 문 옆에 세워 두면 모든 액(厄)을 물리친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도 하였다.
(3)애호(艾虎) 만들기
『동국세시기』에 보면 단오 날에는 궁중에서는 애호(艾虎:쑥으로 만든 호랑이)를 만들어 규장각의 벼슬아치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하였다. 비단으로 만든 조화를 가는 볏짚으로 묶었는데, 그 나풀거리는 모양이 마치 여뀌(蓼)의 이삭 같다.
《세시잡기(歲時雜記)》에 단오 날 비단을 잘라 조그마한 호랑이를 만들어 쑥 잎을 붙여 머리에 꽂는다고 했다. 우리나라 애호제도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4)단오부채(端午扇)
단오 날 공조(工曹)에서는 단오부채(端午扇)를 만들어 진상한다. 그러면 임금은 그 부채를 각 궁가와 재상, 시종신들에게 나누어 준다. 부채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대나무로 만든 폭이 화살 크기만 한데, 40개 내지 50개나 된다. 이것을 백첩(白貼)이라 하고 옻칠을 한 것을 칠첩(漆貼)이라 한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사와 통제사는 단오절에 올리는 부채[節扇]를 진상한다. 그리고 예(例)에 따라 조정의 신사와 친지들에게도 선사 한다. 또 부채를 만든 읍의 수령들도 역시 나라에 진상하고 선사도 한다.
부채는 전주와 남평에서 만드는 것을 으뜸으로 꼽았다.
(5) 부적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주사(朱砂로) 天中節 [천중절 :단오]의 붉은 부적을 박아 대궐에 올린다. 대궐 안에서는 그 부적을 문설주에 붙여 불길한 재액을 미리 막게 한다.
경사대부(卿士大夫) 집에서도 단오 부적을 붙인다. 그 부적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5월 5일 천중절에 위로는 하늘의 녹을 받고 아래로는 땅의 복을 얻어 치우(蚩尤 :중국 전설상의 인물로 병사를 맡은 軍神)의 신의 구리 머리, 쇠 이마, 붉은 입, 붉은 혀에 404病이 일시에 없어져라. 빨리빨리 법대로 시행하라」
(6)제호탕 (醍醐湯)
제호탕은 여름에 먹는 청량음료를 겸한 보약이다.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임금에게 제호탕을 만들어 바친다. 또 옥추단(玉樞丹)도 만들어 금박으로 싸서 바친다. 임금은 그것을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러면 그것을 오색실로 장식하여 재액을 ?는다고 차고 다닌다.
3. 단오의 풍속 놀이
(1) 씨름
씨름은 가장 오래된 경기로서 옛날부터 5월 단오, 7월 백중절 등 주로 모든 국민들이 특별한 날로 여기는 날에 전국 각처에서 년 중행사의 하나로 거행되어 오던 민속 경기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씨름경기를 할 때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민족정신이 생동하는 것을 느끼게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경기에 비하여 이 씨름에는 우리 민족의 순박함과 정서가 스며있고, 쾌락이 있으며, 사나이다운 기상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씨름을 언제부터 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삼한시대를 거쳐 삼국시대부터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각저총(씨름무덤)이 지금도 중국 요령성 집안시 광개토왕릉 건너편에 보존되어 있다. 4세기경으로 추측되는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 角抵塚)의 가장 안쪽 방의 벽화[主室 石壁 壁畵(각저도角抵圖)]에 고구려 사람들의 씨름하는 광경을 그린 벽화가 있다.
이 그림에는 구경 혹은 심판하는 한 사람이 서있고, 두 사람이 맞붙어서 씨름하는 그림이 보인다. 이처럼 무덤의 벽화에 까지 이러한 광경을 그린 것을 보면, 그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씨름을 얼마나 좋아했는가를 알 수 있거니와, 이 것으로 보아 한국의 씨름이 삼국시대에 존재하였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문헌에 씨름에 관한 것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 충숙왕 8년(1339) 3월조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 보면 「…3월에 왕이 정무를 폐신(嬖臣:총애를 받는 신하) 배전(裴佺)과 주주(朱柱) 등에게 위임하고 날마다 내수(內竪:궁중에서 섬기는 낮은 벼슬아치)로 더불어 씨름을 하였는데, 위와 아래의 禮 가없었다. 고 하였으며, 충혜왕 4년(1343) 2월조의 기록에는 「… 봄 2월 甲辰일에 왕이 용사를 거느리고 씨름 놀이를 구경하였다」고 하였으며, 5월조에는「 … 辛卯일에 공주가 연경궁(延慶宮) 으로 옮기니 왕이 주연을 베풀고 위로하여 주고, 밤에는 씨름 놀이를 구경하였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고려시대 씨름에 관한 몇 개의 기록이 더 있다. 그리고 기록으로 볼 때 당시에 씨름꾼을 ‘용사(勇士)’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씨름에 대한 기사가 적지 않게 보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면
세종8년(1426) 3월 25일조에 「… 두 使臣이 목멱산(木覓山(지금의 남산)에 올라 도성과 한강을 굽어보고 말하기를, 정망 좋은 땅이라 하고, 인하여 활을 쏘고 力士들에게 씨름을 시켰다. 고 하였으며, 4월2일 조에도 두 사신이 목멱산에 올라가서 力士로 하여금 씨름하게 하였다. 는 기사가 보인다. 여하튼 세종 년 간 에는 씨름에 관한 기사가 자주 보이고 있다.
다음으로는 『명종실록』의 기사 하나를 더 살펴보면, 명종 15년(1460) 5월조에 보면
세자(뒤에 선조)가 단오절을 맞아 스승 원계검(元繼儉)에게 선물을 보내면서 춘궁별감(春宮別監:춘궁은 세자의 별칭으로 동궁이라고도 한다. 별감은 그 경호책임자이다) 박천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박천환이 심부름을 마치고 원계검이 써준 감사의 글을 들고 거들먹거리면서 돌아올 때였다. 한 무리의 성균관 유생들이 길가에서 씨름판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박천환의 거만스런 행동이 거슬렸는지 그에게 한판 씨름을 붙자고 강요하였다. 박천환이 화를 내며 욕질을 하자 유생들이 몰매를 안기고 옷과 패랭이와 글을 적은 종이까지 찢어 버렸다.
박천환이 돌아와 이일을 고발하자 명종은 유생들의 기강을 개탄하며 모두 잡아들이라고 분부하였다. 왕은 이 사건을 계기로 삼아 도박, 답교와 함께 씨름 금지령을 내렸다. 이것이 씨름 수난사의 한 사례인데 그 뒤에도 종종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곧 풀리기 일쑤였다. 위의 사건을 보면 유생들이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씨름판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현종실록』 5년 (1664년) 정월조에 보면 「…廣州 저자도(楮子島)의 사삿집 종 先이 같은 동리에 사는 世玄과 더불어 씨름을 하다가 이기지 못함에 노하여 찔러 죽였다」고 하였다. 이는 씨름에 과열한 나머지 이러한 불상사를 일으킨 것이다.
이제 왕조실록 이외의 다른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경도잡지京都雜誌』 5월 단오 조에는 「서울의 소년들이 남산 기슭에 모여 씨름을 하는데, 그 방법은 두 사람이 서로 대하고 구부려 각각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왼손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다리를 잡은 다음, 일시에 일어나면서 서로 번쩍 들어 메어친다. 여기의 씨름 기술에는 內國[배지기], 外局[등지기], 輪起[딴족거리] 등의 여러 가지가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5월 단오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젊은이들이 남산의 왜장(倭場)이나 북악산의 신무문(神武門) 뒤에 모여 씨름을 하여 승부를 겨룬다. 그 방법은 두 사람이 서로 상대하여 구부리고 각자 오른손으로 상대자의 허리를 잡고, 왼손으로 상대자의 오른다리를 잡고 일시에 일어나며 상대자를 번쩍 들어 메어친다. 그리하여 밑에 깔리는 자가 지는 것이다. 內國, 外局, 輪起 등 여러 자세가 있고, 그 중에 힘이 세고 손이 민첩하여 연달아 이기는 사람을 도결국(都結局)이라 한다. 중국 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고려기(高麗技)라 하기도 하였다. 단오 날 이 경기는 매우 성하여 서울을 비롯해서 각 지방에서도 많이 한다.」 고하였다.
『개성지開城誌』 風俗조에는 「…5월 5일에 여자들은 성장(盛裝)으로 경덕궁(敬德宮)에 모여 그네뛰기를 하고, 남자들은 만월대에 모여 씨름을 한다」 하였다.
또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의하면, 정읍⦁ 용안⦁ 함열 세 고을의 사이에 광장이 있는데, 매년 중원절(中元節)에 호남 일도의 힘센 자들이 양식을 짊어지고 와서 씨름놀이를 한다. 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씨름이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을 탔다. 임진왜란 때의 이름난 의병장 김덕령은 소년 시절 장성 일대의 씨름계를 휩쓸던 장사를 땅에 메어꽂은 일로 일찍부터 씨름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을 따라 만주 땅 심양으로 갔던 금여준은 그곳에서 이름난 씨름꾼과 맞붙었는데 그 씨름꾼의 머리를 땅에 처박아 죽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씨름대회의 규모도 커지고 관심도 많아지면서 씨름대회에서 1등을 하면 상품으로 황소를 주었다. 일등상품으로 황소를 주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확인 할 수 없지만 농업을 적극 장려했던 조선 후기의 분위기와 연관이 있을 듯하다. 농경사회에서 황소는 최고의 재산 가치를 뜻한다. 2~3등에게는 무명, 솥, 그릇 따위의 생활용품을 상으로 주었다.
씨름에는 농민적 정서가 짙게 배어있다. 농촌에서는 두레의 일환으로 씨름판을 벌였다. 씨름은 두레의 외형적 유대를 결속시키는 놀이였다. 두레 노동을 할 때 여럿이 두렛상에 둘러 앉아 점심밥을 먹고 낮잠을 한 숨 잔 뒤 곧잘 씨름판을 벌였다.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놀이로 푸는 것이며, 한편 힘센 농사꾼을 가려내는 한 방법이기도 했다. 추수를 축하하는 축제에도 어김없이 씨름이 등장하고 농한기에 힘을 기르는 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씨름대회는 곧 축제였으며, 대회에서 타는 상품은 마을의 잔치 경비로 쓰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씨름이란 말은 서로 버티고, 힘을 겨루는 뜻의 씨룬다의 타동사에서 씨룸 →씨름으로 명사화된 말이다.)
(2) 그네뛰기
그네뛰기는 추천(鞦韆) 놀이라고도 하여, 우리나라 단오절의 행사 중 2대 놀이로서 남성의 씨름 놀이와 더불어 여성놀이로서는 가장 크고 또한 유명하였다.
그네뛰기는 주로 야외에서 하는 놀이였다. 튼튼한 나뭇가지에 두 줄을 묶고 밑에 발판을 연결해 사람이 올라가 앞뒤로 굴러 공중을 오르내린다. 이처럼 줄을 달아 벌이는 놀이라 하여 한자어로 추천(鞦韆)이라 한다. 그네뛰기는 북방민족에서 기원하여 고대 중국으로 흘러들어 궁중과 여염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신라 후기에 당나라에서 들어 왔다는 설이 있다. 문헌상으로는 11세기 초 고려 현종(1009~1030)때에 나타난다. 이 시기에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왔던 곽원(郭元)이 “고려는 단오에 그네놀이를 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리 성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그네뛰기 풍속이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고려사』 열전 최충헌전에 보이는 기사이다. 고종3년(1216)에 무신정권의 실력자인 최충헌이 단오절에 궁중에서 사흘 동안 잔치와 아울러 그네뛰기 시합을 개최한 적이 있다. 여기에 보면 「… 단오 날에 충헌이 그네뛰기를 백정동궁(栢井東宮)에 베풀고 문무 4품 이상을 초청하여 연회하기를 사흘 동안 하였다」 고 하였다. 또한 열전 최이전에도 그네뛰기에 대한 기사가 보이며, 우왕(辛禑)전에는 우왕이 거리를 순행하고 수창궁(壽昌宮) 으로 가서 그네뛰기를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네뛰기 시합을 할 때면 산중턱에 비단 장막이 들어서고 꽃으로 꾸민 그넷줄이 내걸렸다. 출전자들은 발을 굴러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며 한껏 기량을 과시했다. 입상자들은 은덩이를 상으로 받았다. 이때부터 단오에는 으레 그네뛰기를 했다. 추천대회에 수많은 남녀가 몰려와 음란한 행동을 하고, 사치를 조장하게 되자 1296년에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네뛰기가 더욱 성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고려시대와는 달리 남성은 빠지고 여성의 전유 놀이가 되었다. 남녀유별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단오절을 맞이하면 사내들은 씨름판으로 몰려가고 아낙네들은 그넷줄이 잇는 곳으로 모여 들었다.
추천대회는 도시 중심으로 열렸는데 서울을 비롯해서 개성, 평양, 사리원, 수원, 남원, 김천 대회가 유명했다.
동네 그네는 아낙네들의 차지였다. 아낙네들은 평소 나들이가 쉽지 않지만 단오 때만큼은 자유스럽게 뛰쳐나왔다. 여자들은 쓰개를 벗어던지고 시원스럽게 그네를 뛰었다. 그네 뛰는 재미만이 다가 아니었다. 싸들고 온 음식을 나눠 먹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마음껏 하루를 즐겼다. 조정에서도 단오절에 여성들의 그네 놀이를 금지하지 않았다. 시인들은 여인들이 그네 뛰는 장면을 보고“선녀가 인간 세상에 하강하였다”는 구절을 즐겨 사용했다.
문헌에 보이는 단오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을 더 살펴보면 『경도잡지京都雜誌』 단오 조에는 “閭巷婦女 盛爲鞦韆戱”라 하여, 여염의 부녀자들이 그네뛰기를 매우 성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단오 조에도 「…항간에서는 남자와 여자들이 그네뛰기를 많이 한다.」고 하였고, 『송경지松京誌』풍속 편에는 「…5월 5일 단오절이 되면 여염집 여자들은 그네뛰기를 하고, 남자들은 씨름을 한다」고 하였다. 또한 『개성지開城誌』 풍속 편에도 5월5일에 여자들은 경덕궁에 모여 그네를 뛰고, 남자들은 만월대에 모여 씨름을 한다 하였다.
이 그네뛰기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민간에서 더욱 성행되어 여성의 놀이로서는 가장 큰 놀이로 자리 잡게 되었다.
4.전주의 단오
전주 단오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구전으로 전해 내래오던 것을 문치상, 이철수, 조병희 선생께서 약간씩 정리한 것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서는 이것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것들도 대체로 일제 강점기나 해방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1) 단오는 전주부중 5대 명절(정월 보름, 사월초파일, 오월 단오, 팔월 추석, 칠월 백중) 가운데 가장 성대한 행사를 해 왔던 날이어서 1935년부터는 전주 시민의 날로 제정되었다.
거리에는 청사초롱을 달아놓고 전야에는 불꽃놀이를 하고 가극, 백일장 등 다채로운 행사가 벌어졌다.
전주 팔경의 하나인 덕진채련의 정취를 연상하면서 전주 부성 사람들은 연꽃 향기가 그윽한 덕진 호반에 모여든다. 먼 지방에서 찾아 온 사람도 있어 그야 말로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여인들은 옷을 벗고 거리낌 없이 목욕하고 머리를 감는다. 옛날부터 전해온 풍속의 하나로 창포와 연 뿌리가 머금어 토해내는 물은 약효가 있었던 까닭이다.
옛날에는 농경의 풍작을 빌기 위하여 제사를 지낸 날이었으나 농촌의 명절로 바뀌어서 수루치를 넣어 만든 둥근 절편을 먹고 여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었다. 남자는 씨름을 하고 놀았다. 액을 예방한다는 뜻으로 단오부적을 기둥에 붙여 놓기도 하고 여인들은 단오장(端午粧)이라 하여 홍색과 청색의 옷을 차려 입고 노리개를 차고 다녔다. 창포로 만든 단오잠(端午簪)이라는 비녀를 꽂았으며 단오선(端午扇)이라는 부채를 들고 나섰다.
(2) 창포탕(菖蒲湯) :음력 오월 오일은 단오절이다. 이날을 중오절(重五節) 또는 천중가절(天中佳節)이라고도 부른다. 단오절은 연중 사대명절 또는 오대명절(정월보름, 사월초파일, 오월 단오, 팔월 추석, 거기에다가 칠월백중을 넣는 수도 있다) 가운데 하나로 꼽아 단오다례(端午茶禮)를 모시는 풍속은 옛날부터 젖어내려 오고 있다. 이날 부성내의 부녀자들은 창포를 삶은 물 즉 창포탕으로 머리를 감기도 하고 또한 그 뿌리로는 수복(壽福)의 글자 모양으로 틀어 그 끝에 연지를 찍어 머리에 꽂고 즐긴다. 이것을 창포잠(菖蒲簪) 또는 단오장(端午粧)이라 부른다.
이 창포의 종류로는 백창포(白菖蒲) 이창포(泥菖蒲) 수창포(水菖蒲) 등이 있는데 꽃은 백색, 靑紫色, 황색 등 이며 무리진 잎 한 가운데서 고동이 솟구쳐 피는 그 청초한 아름다움을 높이 사는 꽃이다.
(3) 그네뛰기
그네뛰기 놀이는 고려 때부터 전해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이는 중국의 단오풍속을 모방한 것이라고도 전한다. 옛날에는 남녀 다 같이 풍치 좋은 곳을 찾아서 낙낙장송 또는 둥구나무 등에 그네를 달아매어 즐겼었다. 특히 부녀자들의 년 중 놀이 하나로 꽃당혜(唐鞋 ⦁革履)는 삼삼, 오오로 나비져 구름 밟듯 알맞게 부는 바람타고 완두(豌豆)빛 잔디로 사분거리는 모란인 듯 천중가절의 녹음 속 헤치고 반공중을 오르내리는 그 양상은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선녀 놀음이라 할 만하였다.
(4) 전주단오제 덕진 물맞이
단오 날에 앞서 먼 곳에 사는 아낙네들은 전날부터 덕진 연못으로 부지런히 모여들어 연못가에서 날을 새면서 단오를 정성들여 맞는 그대견한 성실을 바라 볼 때 건지산 내리 깔은 덕진 연당의 일원동천(一圓洞天)을 눌러 덮을 성황을 가히 짐작 할 수 있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면 덕진 연못은 야단이 난다. 새벽부터 떼 몰려 무려 5리 바탕에 미치는 연못 둘레 약 1830m(1935년 10월 연못 修築시 기록)로 꽉 차있는 아낙네들로 꽃구름 핀 모습은 가을 하늘의 별도 무색하리만큼 강변 가에 자갈 쓸리듯 겹겹이다.
1959년부터 이 단오절을 특히 「전주시민의 날」로 설정했다는 것은 커다란 의의가 있다 하겠다. 풍성한 옥토로 누벼 백곡은 주변 들녘으로 돌고 청람천리(靑嵐千里)로 탁 티어 나가는 아름다운 사고진(四高(固)鎭)의 파랑지는 원무곡(圓舞曲)속인 시방동천(十方洞天)위에 200년을 우뚝 솟아 내려 보고 서있는 호남제일성의 풍남문 땅이 낳은 선약(仙藥)터를 찾아 산하산지로부터 쏟아지는 오월 훈풍의 햇볕 아래 연당 물에 온 몸을 부끄러움 없이 담그어 낸다.
이 덕진 약수물을 맞고 돌아간 후 부터는 부스럼, 땀띠, 안질, 두통, 신경통, 골통, 요통, 견비통 등 할 것 없이 모조리 씻은 듯 낫게 하여 줄뿐더러 일 년 열두 달 감기 한번 앓지 않는 선약이 되어 달라고 축원을 빌면서 흥겨운 단오절을 맞는데 이것이 요즘 사람들이 여름에 바다로 달려가서 즐겨 찾는 해수욕으로는 감히 비견 할 수 없는 야단법석으로 소용돌이치는 단오절의 물맞이였다. 이걸 가리켜 파천황(破天荒)의 일대 기관(奇觀)이라 할 것이다.
8⦁15 해방 전 까지만 하여도 황해도 재령 땅에서 소문 듣고 선약 터라고 찾아와서 합장 끝에 툼벙 몸을 담그던 할머니가 있었는가 하면, 산수 좋은 강원도 땅에서도 찾아오고, 촉석루 진주 땅, 영남루 밀양에서도 오고, 토정비결을 낸 고을 충청도 인주(仁州) 땅에서도 오고, 도고, 온양 온천을 뿌리치고 서해 여울 가를 부산하게 달려 왔다는 고부(姑婦)도 있었다.
이렇듯 방방곡곡에 약수터라는 소문은 높이 퍼져 해마다 단오절이 오면 덕진 연당 주변의 땅 빛은 동이 나듯 발 디딜 곳 없는 아낙네들로 꽃이 피었던 곳이다. 그 뿐인가 우리 부성 팔경가운데서도 풍치 좋기로 가히 으뜸으로 꼽는 덕진채련의 덕진 연당은 과시 천고(千古)로부터 자랑스럽게 내려오고 있는 곳이다.
**단오절(음 5.1~5.5) 전주단오제의 축은 성황산의 성황제와 덕진 연못의 물맞이였다. 성황제가 단오절에 전주의 수호신인 김부대왕 일가에게 성황제를 지내는 관행이라면, 덕진 물맞이는 단오일에 덕진 연못의 물탕거리에서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이 연못의 물로 목욕을 하는 관행을 말한다. 덕진 연못의 물은 건지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연못의 바닥에서 솟아나는 용천수(湧泉水)로, 물이 깨끗하고 수량이 풍부하여 물맞이하기에 좋았다. 용천수는 땅속에서 솟아나는 물을 말한다. 실제 덕진 연못의 물은 건지산에서 내려오기도 하지만, 자체적으로 바닥에서도 솟는다. 그래서 덕진 연못에는 ‘무넘이’라는 지명이 붙어 있다. 무넘이는 ‘물이 항상 넘치는 곳’이란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옛 문헌기록에도 덕진 연못에 대하여 깊고 맑은 물이라 하였다.
마을주민들은 덕진 연못의 물을 줄뿌리, 연뿌리, 창포뿌리가 썩어서 생겨난 약물이라고 믿었다. 덕진 연못은 천연 못으로, 숲속의 옹달샘과 같이 자연경관이 좋아 전주팔경 가운데 덕진채련(德津採蓮)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단오제는 모내기를 마친 직후, 본격적으로 여름철에 접어드는 시점에 거행된다. 단오절은 농민들에게 농한기다. 뙤약볕에 벼가 잘 자라도록 하늘을 향하여 우순풍조를 기원하는 기우제가 농민들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면, 부녀자들은 후덥지근한 기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앞서 몸을 깨끗하게 정화하여 건강을 관리하는 게 가장 큰 소망이었다. 이러한 전주사람들의 소망이 덕진 연못에 그대로 깃들어 있다.
최근까지도 덕진 연못의 물탕거리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지금도 단옷날에는 전주 인근의 사람들이 덕진 연못에 물맞이를 즐기러 온다. 덕진연못의 물맞이는 호남 일대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단오물맞이였다.
이러한 사실은 1938년 7월 16일 자 「동아일보」 “내 지방의 여름풍물–덕진 물맞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기사의 내용을 분석ㆍ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⓵ 덕진 연못의 물맞이는 전주의 역사적 명물인데, 호남 일대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단오명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호남 일대에서 무려 3만 명이 단옷날에 덕진 연못에 몰려든 것이다. 3만여 명이 덕진 못가에서 대혼잡을 이루는 난장(亂場)이 매년 덕진 연못의 단오풍정이었다. 전주 단오난장은 단옷날 덕진 연못에서 이뤄졌으며, 호남 일대에서 주민들이 물맞이를 하려고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난장이 터진 것이다.
⓶ 덕진 연못 단오물맞이가 부녀자들의 해방적인 약수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날에 부녀자들이 반나체로 물맞이 목욕하는 것을 구경삼아 남자들이 몰려들고, 그 과정에서 남녀가 서로 얽혀 벌어지는 난장이 매년 단옷날 덕진 연못에서 연출되었다. 물맞이는 부녀자들이 질병 치유 및 예방을 목적으로 목욕하는 전통적 관행이지만, 유교적 생활 관념으로 가정에 얽매여 생활하던 부녀자들에게 물맞이는 해방적 성격이 강한 ‘약수(藥水)놀이’였던 것이다. 전주
사람들은 덕진 연못의 물을 약수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약수의 효험이 있다고 믿고 매년 단오일에 덕진 연못으로 몰려들었다. 덕암마을 주민들은 연뿌리, 줄뿌리, 창포뿌리가 썩어서 우러나온 물이니 약수라고 강변한다. 물의 오염을 따지는 사람들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해마다 단옷날이면 부녀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덕진 연못을 찾았다. 물맞이는 부녀자 중심의 단오절 약수놀이로서, 목욕을 하는 게 전통적 관행으로 정착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⓷ 전주 단오물맞이는 단옷날 단 하루다. 꼭 단옷날에 몸을 씻어야 약수의 효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오일에 목욕을 하는 전통적인 관행에 따라 단오일 외에는 물맞이를 즐기는 사람이 없다. 단오일에 덕진 연못의 물맞이는 피부병과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는 소문으로 해마다 사람들이 찾아와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덕진 연못 주변의 덕암마을 주민들도 어깨・무릎・발이 결리거나, 눈에 다래끼가 나거나, 부스럼 등은 물탕거리에 가서 몸을 씻으면 낫는다는 약수 경험담을 늘어놓는다. 왜 덕진 연못의 물은 효험이 있다고 하는 것일까.
⓸ 덕진 연못 가운데에서 ‘온천이 솟는다’는 말이 전해온다. 덕진 연못의 물이 양수로서 효험이 있다면 광물질이 함유된 온천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인데, 덕진 연못의 바닥에서 솟아나는 따뜻한 온천물이 아니라 용천수의 분출을 빗댄 표현이다. 덕암마을 주민들은 예전에는 덕진연못 바닥에서 지하수가 솟았으나, 팔각정을 짓고 난 뒤에 물구멍이 막힌 듯 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온천이 솟는다는 말은 건지산 자락의 지층에는 물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덕진 연못뿐만 아니라 용수동과 연화마을, 대지마을 등에도 수렁 뱀이 있었고, 건지산 곳곳에 물수렁이 있었다. 따라서 건지산 천수답은 수렁물로 농사를 지었다. 전주 덕진 연못의 수질개선은 결자해지다. 건지산의 풍부한 수자원을 복원하는 일이다. 건지산은 낮지만 물이 풍부하여 수원을 되살리고 물길을 덕진 연못으로 되돌리는 복원이 하루 빨리 이뤄져야겠다. 그 길은 조경단 앞에서 합수하는 물이 연화천으로 흘러 덕진 연못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⓹ 덕진물맞이가 전주의 대표적인 명절풍속이었고, 이날 덕진 연못에서 추천대회, 자전차대회 등 다양한 민속놀이가 벌어지는 관행에 따라 열차와 자동차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아침부터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점원 직공에서 상류층 부인들까지 몰려들었으니 자연스럽게 전주난장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전주단오제가 덕진 연못에서 열린 것이고, 물맞이는 축제적인 분위기에서 전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통기관의 추정이 1만 명이고, 언론에서는 3만 명 정도라 하니 좁은 덕진 연못에 사람들이 꽉 찰 정도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전주에서 단오제가 가장 규모가 큰 축제였고, 단오물맞이의 관행도 전통적으로 내려왔다. 이러한 단오물맞이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일까? 물론 아니다. 이러한 단오물맞이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에 전주의 덕진 연못은 천연 샘이었다. 전주 사람들은 여름 맞이 통과의례를 이곳 덕진 연못에서 거행하였던 것이다. 단순히 몸을 씻는 게 아니라 신성한 세례의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물세례(洗禮)’라는 용어도 전통적인 물맞이에서 나온 것이다.
⓺ 단옷날 덕진 연못은 정기적인 재회의 기회였고, 만남의 장이었다. 물맞이의 단오풍속은 시집간 여자가 친정나들이를 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집살이와 여성들의 외출이 쉽지 않았던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단옷날 덕진 연못의 물맞이였다. 딸이 시집간 지 몇 해 만에 물맞이에 나와 우연히 친정어머니를 만나 기뻐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가 하면시집살이 시키는 늙은 사돈을 만나서 자기 딸을 학대하지 말라고 사돈 간에 싸움질하는 광경도 단옷날 덕진 연못의 풍정(風情)이었다. 이처럼 덕진 물맞이는 부녀자 중심의 전통명절이어서 여자들끼리 만나서 회합하고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공간 기능도 하였다. 예전에는 부녀자가 시집을 가면 평생 친정나들이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던 시집살이 시절에 단오물맞이는 허가받은 관습적 외출이었다. 며느리가 시집살이의 한을 풀 수 있는 곳도 덕진 연못 단오물맞이였다.
친정어머니만 만났을까.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어릴 적 친구도 만나고, 보고 싶은 애인을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연정을 품은 처녀총각들은 단옷날에 덕진 연못을 찾는 게 하나의 관행이었고, 자기 짝을 찾아 덕진 연못을 헤매기도 했을 것이다.
⓻ 단오물맞이의 중심은 덕진 연못의 무네미였다. 앞의 덕진연못 단오물맞이 광경 사진처럼 부녀자들은 다리 아래 무네미로 몰려들어 물맞이를 즐겼다. 덕암마을 주민들은 그곳을 ‘물탕거리’라 한다. 물탕거리는 ‘물로 몸을 씻는[盪] 곳’이라는 뜻인데, 단옷날에는 부녀자들이 제일 붐비는 곳이다. 따라서 덕진 연못의 물탕거리는 연못의 물이 흘러내려 가는 무네미이며, 그곳이 몸을 씻기 좋은 곳이어서 물탕거리라 하였다. 물탕거리에는 근대화된 수문이 있다. 물
탕거리에서 목욕하는 부녀자들은 수백 군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체면이나 부끄러움 없이 군중심리에 따라 대담하게 나체를 노출시키고 목욕을 하였다. 물탕거리에서 부녀자들이 반나체(半裸體)의 모습으로 목욕을 하기에 경찰당국에서는 풍기문란의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남자들의 출입을 엄금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부녀자들에게 물맞이는 신성한 세례의식일 뿐 풍기문란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풍기문란은 혈기왕성한 남자들이 물탕거리에 몰려들어 얼씬거리며 반라를 훔쳐보는 게 직접적인 요인이다. 혜원 신윤복이 그린 「단오풍정」을 들여다보면, 기녀들이 물 좋은 계곡에서 반라 상태로 목욕을 하고 있는데, 까까중머리 한 남자들이 바위틈에 숨어서 기녀들의 반라 목욕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물맞이 의식이 덕진 연못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던 것이다. 부녀자들의 반나체 물맞이는 성스런 세례의식을 거행하는 의례행위인데, 남자들이 몰려가 성을 훔치면서 풍기문란을 유발한 것이다. 풍기문란의 결과는 쌍방 책임이지만, 발단은 남자들의 눈요기에 서 시작되었다. 동남아시아에서 물세례는 성스러운 종교의식으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나, 유교 질서의 500년을 거치는 동안 여인들의 옷 벗고 목욕하는 의식이 낯선 풍경이 되었고, 풍기문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여인들이 반라로 물맞이하는 의식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라 뿌리 깊은 전통의식이란 사실은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⓼ 물맞이가 전통명절로서 축제의 기능을 하였고, 난장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난장의 핵심 요인은 물맞이를 하러 온 부녀자들이 반나체로 목욕하는 광경이었다. 부녀자들이 반나체 상태로 목욕하는 행위가 풍기문란 문제를 유발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듯이, 단옷날 덕진 연못의 물맞이는 남자들까지 합세하여 난장이 터지면서 군중심리가 발동하여 남녀 간 풍기문란의 단오난장이 터진 것이다.
여인들의 반라 천국인 덕진 연못에서는 자연스럽게 다섯 가지 ‘맞이’의 단오난장이 하나의 풍속이었다. 전주 단오물맞이는 “물 맞고, 비 맞고, 서방 맞고, 매 맞고, 소박맞고”라는 관행이 있었다. 물 맞고는 물탕거리에서의 물맞이를 말하고, 물탕거리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 맞기도 하고, 서방 맞고는 덕진연못 단오난장에서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외도의 불륜을 저지르는 행위를 가리키며, 매 맞고는 단오난장에서 바르지 못한 외도로 남편에게 매 맞는 일도 종종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소박맞고는 단오물맞이에 가서 저지른 불륜으로 부녀자가 시집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다섯 가지 맞이는 전주단오제의 난장이 성대하게 열린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맞이를 통해 전주 덕진 연못의 단오물맞이는 오늘날 축제문화의 원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단오난장이었던 것이다.
난장은 무질서하고 문란하고 혼돈의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군중심리에 따라 자율적으로 억제하지 못하고 분위기에 휩싸여 놀고 즐기는 축제의 원형이었다. 덕진 연못 단오물맞이는 단옷날 3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고, 물탕거리에서는 부녀자들이 반나체로 물맞이를 즐기는 해방적 약수(藥水)놀이였다. 약수놀이는 전적으로 여성중심의 물맞이 민속이었으나, 남녀 군중이 몰려들면서 신경통과 피부병을 치유・예방하기 위하여 물맞이를 즐기는 것보다 혼잡한 난장의 분위기에서 해방감에 도취된 단오 엑스타시 현상이 유발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물맞이가 세례의식이었으나, 조선왕조를 거치면서 남성의 호기심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조선조 가부장적 사회의 전통이 강하게 내려오는 근대화 과정에서 가정생활에 스트레스를 받고 억눌렸던 부녀자들이 단옷날에 덕진 연못에서 반나체 물맞이를 즐기는 해방감의 도취가 단오난장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5. 나오는 말
단오의 풍속은 원래 농경 사회에서 행해지던 풍년기원제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삼한시대부터 유래되었고 그 가운데서도 마한 땅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주의 단오풍속은 그 역사가 오래고 전통도 이어져 내려왔다.
1927년 동아일보 기록을 보면 “전주덕진 하류수에는 년년히 단오에 당디 부녀들이 모아서 놀면 무병하다는 전설이 잇서 금년에도 수천군상이 모히여 유쾌히 놀앗다고 합니다(전주)라는 기록이 있다.
또 일제 강점기인 1935년과 해방 후인 1959년에 단오날을 ‘전주시민의 날’로 지정하여 전주 사람들은 큰 명절처럼 보냈다. 지금에 와서는 농경사회의 모습도 바뀌고 전통도 바뀌어 가지만 단오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이 지역의 정서는 남아 있다고 본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단오 행사는 풍어제 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1974년에는 단오절을 시민의 날로 정하여 풍남제로 명칭을 바꾸어 행사를 했으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거시적으로 행사를 치루었다.
그 후 풍남제는 다시 전주단오로 명칭을 바꾸어 꾸준히 창포물 머리감기와 그네뛰기, 민속씨를, 남사당, 단오선 만들기를 하면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앞으로 전주단오가 농경을 바탕으로 한 풍년기원제 성격이 점차 확산되고 계승하는 행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